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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 장바구니에 바나나를 담으면서 씨앗이 없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여긴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냥 원래 그런 과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씨앗이 없으면 대체 어떻게 심어서 키우는 걸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알아보기 시작하니 바나나에는 제가 전혀 몰랐던 이야기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습니다. 나무인 줄 알았는데 풀이고, 씨앗 없이 번식하고, 지금 우리가 먹는 품종은 한 번 멸종에 가까운 위기를 겪은 대체품이었습니다.
바나나는 나무가 아닌 풀, 씨앗 없이 자란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굵고 단단한 줄기에 넓은 잎이 달린 바나나를 당연히 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나나는 나무가 아니라 풀입니다. 식물 분류상 파초과(Musaceae)에 속하는 초본식물, 즉 목질 조직이 없는 풀입니다. 여기서 초본식물이란 줄기 내부에 나무처럼 단단한 목질부가 형성되지 않는 식물을 말합니다. 우리가 나무줄기처럼 보이는 부분은 사실 잎의 밑동, 즉 엽초(葉梢)가 겹겹이 말려 쌓인 가짜 줄기입니다. 단면을 잘라보면 동심원처럼 잎이 층층이 감겨 있는 구조가 드러납니다. 제가 직접 마트에서 사 온 바나나의 줄기 끝 단면을 살펴봤는데, 정말로 단단한 목질이 아니라 촘촘히 말린 섬유 덩어리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줄기는 어디 있을까요. 바나나의 진짜 줄기는 땅속에 묻혀 있습니다. 이를 근경(根莖, rhizome)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근경이란 땅속에서 수평으로 자라는 줄기로, 감자처럼 양분을 저장하고 새로운 싹을 틔우는 역할을 합니다. 이 근경에서 흡아(sucker)라 불리는 새싹이 10개 안팎으로 돋아나는데, 이것을 잘라 옮겨 심으면 어미 식물과 유전적으로 동일한 바나나가 자랍니다. 씨앗 없이 번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바나나 꽃도 생각과 달랐습니다. 열 달쯤 자란 바나나는 줄기 중앙에서 커다란 꽃대를 내밀고, 그 안에 층층이 꽃이 피어납니다. 우리가 먹는 바나나 한 개는 이 꽃 하나가 자란 것입니다. 꽃이 열매로 자라면서 꽃대가 아래로 처지고, 그렇게 주렁주렁 달린 원통형 다발이 완성됩니다. 마트에서 파는 한 송이는 이 큰 다발에서 잘라낸 일부입니다. 게다가 바나나는 녹색 상태에서 수확해 운반하고, 판매처에 도착한 뒤 에틸렌(ethylene) 가스에 노출되면서 노랗게 익습니다. 여기서 에틸렌이란 과일이 익으면서 자연스럽게 방출하는 식물 호르몬으로, 주변 과일의 숙성을 함께 촉진하는 역할을 합니다. 사과와 함께 보관하면 바나나가 빨리 익는 이유도 바로 이 에틸렌 때문입니다(출처: FAO - Bananas Post-harvest Operations).
- 바나나는 목질 조직이 없는 초본식물(풀)로, 우리가 보는 줄기는 잎이 겹겹이 말린 가짜 줄기다
- 진짜 줄기인 근경은 땅속에 있으며, 여기서 흡아가 자라 새 바나나를 번식시킨다
- 수확은 녹색 상태에서 이루어지며, 에틸렌 가스로 유통 과정에서 숙성된다
유전적 다양성을 잃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
흡아로만 번식한다는 사실이 처음엔 편리해 보였습니다. 씨앗을 뿌릴 필요도, 수분을 기다릴 필요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제 경험상 이런 식으로 편리함만 쫓다 보면 어딘가 반드시 빈틈이 생기더라고요. 바나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흡아를 잘라 복제하듯 심기를 반복하면 모든 바나나의 유전자가 사실상 동일해집니다. 유전적 다양성(genetic diversity)이 극도로 낮아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전적 다양성이란 같은 종 안에서 개체들이 서로 다른 유전자를 얼마나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느냐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이 다양성이 낮을수록 특정 병원균에 집단 전체가 동시에 취약해질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이 이론이 현실로 드러난 사례가 있습니다. 1950년대 이전까지 전 세계 바나나 시장을 장악한 품종은 지금의 캐번디시(Cavendish)가 아니라 그로 미셸(Gros Michel)이었습니다. 지금 먹는 캐번디시보다 더 굵고 단맛이 진해 당시엔 표준 상품 바나나였습니다. 그런데 토양을 통해 퍼지는 파나마병(Panama disease), 정확히는 푸사리움 옥시스포룸 쿠벤스(Fusarium oxysporum cubense)라는 곰팡이균이 농장 전체를 초토화시켰습니다. 이 균은 뿌리를 통해 흡수되어 수분 이동 통로인 물관을 막고, 잎을 노랗게 시들게 한 뒤 식물 전체를 고사시킵니다. 유전적으로 거의 동일했던 그로 미셸은 집단 면역이 없었고, 결국 1950년대 후반에 상업 재배지에서 사실상 자취를 감춥니다(출처: ProMusa - Gros Michel banana variety).
이 상황에서 살아남은 품종이 지금 우리가 매일 먹는 캐번디시입니다. 맛은 그로 미셸에 비해 한 수 아래라는 평가가 많았지만 파나마병에 내성이 있었기 때문에 대체 품종으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캐번디시 역시 흡아로 복제 재배된다는 점입니다. 1994년부터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TR4(Tropical Race 4)라는 변종 파나마병균이 캐번디시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지금도 확산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로 미셸 때와 같은 역사가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편리함을 위해 다양성을 희생하는 방식이 장기적으로 안전한가, 라는 질문을 피하기 어렵다고 느꼈습니다. 바나나를 더 달콤하게, 더 균일하게, 더 많이 생산하는 방향으로만 달려왔는데, 정작 그 시스템이 단 하나의 균에 의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농부나 기업의 잘못으로만 돌리기는 어렵습니다. 병에 강한 새 품종을 개발하고 소비자가 익숙한 맛을 유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야생 바나나와 지역 품종의 유전자원을 보존하는 일도 생산성만큼 중요한 과제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상품 가치가 없어 보이는 품종 하나가 미래의 해결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마트에서 바나나 가격을 확인하는 것만큼이나, 이 바나나가 어떤 과정으로 여기까지 왔는지를 가끔은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 있다고 느끼게 된 계기였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바나나에 씨앗이 없는 이유가 뭔가요?
A. 야생 바나나 중 씨앗이 없는 돌연변이를 발견해 그 품종만 선택적으로 재배해온 결과입니다. 씨앗이 없으니 수분과 수정 없이도 흡아를 통해 번식시킬 수 있어 재배가 편리하지만, 그 대신 유전적 다양성이 크게 줄어드는 구조적 단점이 함께 따라옵니다.
Q. 그로 미셸 바나나는 지금도 먹을 수 있나요?
A. 멸종한 것은 아니고 상업 재배지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소규모로 재배되고 있어 구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만 파나마병에 취약한 특성이 해결되지 않아 대규모 상업 재배로 돌아오기는 어려운 상황으로 보입니다.
Q. 캐번디시 바나나도 정말 없어질 수 있나요?
A. 완전 멸종보다는 상업적 재배 규모가 크게 줄어드는 시나리오가 더 현실적이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TR4 변종균이 아직 중남미 주요 재배지까지 퍼지지 않았고, 유전공학 기술로 내병성 품종을 개발하는 연구도 진행 중입니다. 다만 그로 미셸의 전례를 보면, 개량된 품종이 지금과 같은 맛과 가격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Q. 바나나가 나무가 아니라 풀이면 왜 그렇게 단단한 건가요?
A. 우리가 줄기로 보는 부분이 실제로는 잎의 밑동인 엽초가 수십 겹 겹쳐 말린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각 층이 서로를 단단히 지지하면서 10m까지 자라는 높이를 버텨냅니다. 나무처럼 목질이 발달한 것이 아니라 층층이 쌓인 구조적 힘으로 단단함을 만들어낸 셈입니다.
결론
매일 아침 아무 생각 없이 껍질을 벗겨 먹던 바나나가, 알고 보니 풀이었고 복제로 번식하고 있었고 전 세대 품종은 이미 한 번 시장에서 퇴장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 경우엔 이걸 알게 된 뒤에도 먹는 행동 자체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마트에 가면 노란 바나나를 집어 듭니다. 다만 그 바나나를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다는 건 사실입니다.
편리함을 극대화한 농업 시스템이 어떤 장기적 위험을 함께 만들어내는지, 바나나는 그 질문을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야생 바나나와 지역 품종의 유전 자원을 보존하는 일이 당장 수익이 나지 않더라도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바나나를 살 때 품종이나 원산지를 한 번쯤 확인해 보는 것, 그 정도의 작은 관심이 첫걸음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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