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악당 탄생 스토리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다시 틀었을 때, 계단 하나, 웃음 한 번, 조명이 깜빡이는 장면 하나가 전부 다 계산된 연출이라는 걸 알아버렸습니다. 영화 조커(2019)는 단순히 DC 빌런의 기원을 다룬 작품이 아니라, 한 사람이 사회에서 철저히 외면당했을 때 어떤 결말을 맞는지를 상징과 심리로 빼곡히 채워놓은 작품입니다.계단이 말해주는 것 — 같은 장소, 완전히 다른 사람일반적으로 영화의 상징 장치는 대사나 음악으로 전달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조커는 그 역할을 '공간'에 맡겼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꽤 드문 방식이었는데, 영화 초반 아서가 집으로 돌아오는 계단 장면이 특히 그랬습니다.아서는 초반부에 그 계단을 무겁게 오릅니다. 어깨가 처지고, ..
포레스트 검프를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로 기억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화면 한쪽에 슬쩍 지나가는 낡은 신발 한 켤레, 유니폼에 묻지 않은 먼지 하나까지 그 디테일들이 쌓이고 나서야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신발 디테일 — 낡을수록 더 소중한 이유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저는 포레스트의 발끝을 유심히 봤습니다. 흰 깃털이 내려앉는 서정적인 오프닝과 달리, 그의 신발은 진흙투성이에 군데군데 구멍까지 나 있었거든요. 처음엔 그냥 지나쳤는데, 다시 보니 그 신발이 왜 그렇게 닳아 있는지가 이 영화 전체의 감정선을 압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 신발은 제니가 포레스트에게 건네준 선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제니는 신발만 남..
제작비 5만 달러. 시나리오 없음. 배우들은 서로의 대사를 몰랐습니다. 그 상태로 찍은 영화가 보는 내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2013년 개봉한 인디 SF 스릴러 코히어런스(Coherence) 얘기입니다. 저는 처음에 큰 기대 없이 틀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평행우주나 양자역학 같은 개념이 단순한 SF 설정이 아니라, 제 자신의 선택과 후회를 건드리는 이야기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배경: 5만 달러와 12페이지 치료 노트로 탄생한 영화감독 제임스 워드 버킷(James Ward Byrkit)은 당시 취업 시장에서 계속 거절을 받던 상황이었습니다. 파이리츠 오브 더 캐리비안 1~3편의 콘셉트 아티스트로 일했고, 단편 연출 경력도 있었지만 메이저 제작사 문은 쉽게 열..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던 적이 얼마나 됩니까. 드니 빌뇌브 감독의 2013년작 는 그런 드문 영화 중 하나입니다. 아이 납치 사건을 추적하는 이야기인데, 막상 보고 나면 범인보다 '선한 사람이 선을 넘는 순간'이 더 오래 머릿속에 남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명치가 불편했습니다.확신의 함정 — 켈러 도버는 왜 괴물이 됐나일반적으로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폭력적인 행동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이해받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이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조금 달랐습니다. 켈러 도버(휴 잭맨)의 행동이 이해되는 순간과 소름 끼치는 순간이 정확히 겹쳐 있었거든요.추수감사절 저녁, 도버의 막내딸 애나와 친구 조이가 사라집니다. 동네에 정차해 있던 수상한 캠핑카가 유일한 단서였고, 운..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2011년 스페인 영화 '줄리아의 눈'을 개봉 당시 극장에서 봤던 저로서는, 리메이크인 '눈동자'를 어느 정도 예측하며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영화가 끝났을 때 제 머릿속엔 딱 하나의 단어만 남았습니다. "뒤통수." 원작을 아는 사람을 오히려 더 잘 속이는 영화라는 게, 이 작품의 가장 영리한 점이었습니다.원작비교 — 줄리아의 눈과 눈동자, 뭐가 얼마나 달라졌나제가 직접 두 영화를 모두 극장에서 본 입장에서 말씀드리면, '눈동자'는 원작에 대한 충실한 재현보다는 적극적인 변주를 선택한 리메이크입니다. 스릴러·호러 장르의 리메이크에서 흔히 쓰는 전략이기도 하죠. 핵심 반전이나 빌런 설정을 그대로 가져오면 원작을 아는 관객한테는 아무런 긴장감도 줄 수 없으니까..
저도 처음엔 그냥 우주 배경 블록버스터 정도로 생각하고 극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데, 정확히 무슨 이야기인지 따라가기가 벅찼습니다. 그게 인터스텔라와의 첫 만남이었고, 그 뒤로 몇 번을 더 봤는지 모릅니다.줄거리 — 지구를 떠나야 했던 이유영화의 배경은 생각보다 훨씬 구체적입니다. 먼 미래의 지구는 식량난과 모래폭풍으로 거의 모든 사람이 농부로 살아가는 세계입니다. 매일 아침 식탁 위 컵을 뒤집어 두고 잠에서 깨면 먼지를 털어내야 하는 일상, 저는 이 장면이 오히려 우주 장면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전직 우주비행사 쿠퍼는 딸 머피의 방에서 이상한 현상을 발견합니다. 책장에서 책이 떨어지고, 먼지가 일정한 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