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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위된 왕에게 밥상을 차려준 사람들이 있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저는 사극을 꽤 즐겨 보는 편이지만, 솔직히 말해 역사 공부를 목적으로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관람하고 나서 처음으로 영화관을 나오자마자 관련 역사를 검색했습니다. 단종이라는 인물이 실제로 17세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거든요.
개유정난, 이 영화가 다룬 역사는 어디까지 사실인가
영화 시작과 함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상상력을 가미한 작품"이라는 문구가 뜨는데, 저는 그 순간 오히려 궁금증이 더 커졌습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 감독의 상상인 걸까 하고요.
역사적 뼈대는 분명합니다. 1452년 문종이 일찍 세상을 뜨자 12세의 어린 단종이 즉위했고, 이듬해인 1453년 숙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켰습니다. 여기서 계유정난이란 수양대군이 책사 한명회와 손잡고 왕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으킨 정치적 쿠데타를 의미합니다. 이후 단종은 1455년 폐위되었고, 1457년 강원도 영월 청령포(淸泠浦)로 유배되어 그해 11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이 흐름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확인되는 역사적 사실입니다(출처: 조선왕조실록 국역 서비스).
반면 영화 속 설정 중 상당 부분은 장황준 감독의 창작입니다. 광청골이라는 마을 자체가 가상의 공간이고, 촌장 어몽도가 마을 부흥을 위해 직접 관아에 찾아가 유배지를 유치하려 안간힘을 쓴다는 설정은 극적 도입부를 위한 장치입니다. 역사 속 어몽도는 강원도 영월의 호장(戶長)이었는데, 호장이란 고려·조선 시대 지방 행정을 보좌하던 향리직을 뜻합니다. 실제 사료에는 단종의 울음소리를 듣고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 단종을 처음 찾아갔다는 기록이 있어, 두 사람의 인연 자체는 역사적 근거가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꽤 영리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팩션(faction), 즉 사실(fact)과 허구(fiction)를 결합한 서사 방식을 통해 역사를 전면으로 재연하는 대신 '주변부 인물의 눈'으로 이야기를 시작함으로써, 역사를 잘 모르는 관객도 자연스럽게 이야기 안으로 끌려들어갈 수 있게 했거든요. 저처럼 역사에 별 관심 없던 사람도 영화관을 나온 뒤 실록을 찾아볼 만큼요.
- 계유정난(1453) — 수양대군·한명회의 정치 쿠데타
- 단종 폐위(1455) → 청령포 유배(1457. 7.) → 사망(1457. 11.)
- 광청골, 유배지 유치 시도, 밥상 서사 — 감독의 창작 설정
- 어몽도의 단종 시신 수습 — 사료에 근거한 역사적 사실
단종 유배, 청령포라는 공간이 말하는 것
청령포(淸泠浦)는 세 면이 서강으로 둘러싸이고 한쪽은 절벽이 막아선, 사실상 탈출이 불가능한 육지 속 고립된 섬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이 공간이 단순한 배경 이상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절경에 가까울 정도로 아름다운데, 그 안에 갇힌 이용이에게는 절망 그 자체인 공간이라는 아이러니가 계속 머릿속에 걸렸거든요.
청령포는 권력에서 밀려난 폐위왕(廢位王)의 처지를 공간으로 시각화한 셈입니다. 폐위왕이란 말 그대로 왕위에서 강제로 내려진 군주를 가리키는데, 이용이는 왕족이라는 이름표는 달고 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전혀 없는, 그야말로 겉만 남은 신분입니다. 물리적으로 고립된 청령포는 그 신분적 고립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뗏목을 타지 않고서는 건너갈 수 없는 청령포는 마을 사람들에게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이용이 자체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 거리감을 허무는 장치로 밥상을 들고 옵니다. 처음엔 의무처럼 차려진 흰쌀밥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린 자식의 밥걱정을 하듯 변해가는 과정이 저는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광청골 사람들이 밥상이 그대로 돌아오면 '입맛이 없으신가'하고 걱정하기 시작했다는 대목에서,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밥 한 끼가 신분의 경계를 허무는 매개가 될 수 있다는 걸 이렇게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구나 싶었거든요.
실제로 문화재청에 따르면 청령포는 2008년 국가지정 명승 제50호로 지정된 공간입니다(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영화 속 묘사처럼 실제로도 기암절벽과 강이 어우러진 풍광이 이채롭지만, 단종의 유배지였다는 사실을 알고 보면 그 아름다움이 오히려 먹먹하게 느껴집니다. 제 경험상 역사적 맥락을 알고 나서 보는 풍경은 분명 다르게 다가옵니다.
어몽도, 왕을 섬긴 신하가 아닌 사람을 지킨 벗
저는 사극을 꽤 많이 봐왔는데, 대부분의 경우 충신(忠臣)은 군주에 대한 의리로 정의됩니다. 그런데 어몽도라는 인물은 그 정의를 살짝 비틀어 놓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충신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마을 부흥을 위해 유배지를 유치하려 관아까지 쫓아간, 솔직히 말하면 셈이 빠른 현실주의자로 시작하죠.
이 점을 흥미롭게 보는 시각도 있고, 어몽도를 너무 코믹하게 설정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 설정이 영화를 살렸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고결한 충심으로 이용이를 대했다면, 두 사람의 관계 변화가 이렇게까지 울림을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감시자로 출발해서 벗으로 끝나는 어몽도의 동선이, 이용이가 왕에서 한 인간으로 변해가는 과정과 겹쳐지면서 서로를 완성시킵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어몽도가 창호문에 뚫린 구멍으로 내어진 활줄을 움켜잡는 장면은, 저도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단종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사약을 거부하다 타살되었다는 설이 유력하고, 야사(野史) 중 하인이 활줄을 당겨 목숨을 끊는 것을 도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서 야사란 공식 사료에 기록되지 않고 민간에 구전된 비공식 역사 기록을 의미합니다. 장황준 감독은 이 야사 속 하인을 어몽도로 바꾸어 이야기를 마무리했는데, 그 선택이 결과적으로 "이제 강을 건널 때입니다"라는 마지막 대사를 단순한 이별 인사가 아니라 서사 전체를 압축하는 문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어몽도의 마지막 대사 속 '강'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강이기도 하고, 왕과 인간을 가르는 강이기도 하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봤는데, 한 가지를 더 보태자면 그 강은 어몽도 스스로도 건너는 강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신하에서 벗으로, 감시자에서 지킴이로. 배우 류해진이 이 장면에서 보여준 울분에 찬 눈물과 목소리는 단언컨대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왕과 사는 남자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가요?
A. 단종의 폐위, 청령포 유배, 어몽도의 시신 수습 등 역사적 뼈대는 조선왕조실록과 야사에 근거합니다. 다만 광청골이라는 공간, 밥상 서사, 마을 부흥을 위한 유배지 유치 설정 등은 장황준 감독의 창작입니다. 역사적 사실과 픽션을 결합한 팩션 영화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Q. 영화 속 단종 이용이는 몇 살에 사망했나요?
A. 역사 속 단종은 1441년생으로, 1457년 유배지 청령포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향년 17세였습니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폐위와 유배, 죽음을 모두 겪었다는 사실이 영화를 보고 나서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Q. 영화에서 한명회가 수양대군 대신 등장하는 이유가 있나요?
A. 장황준 감독이 기존 미디어 속 한명회와 다른 이미지를 구현하고 싶었다는 인터뷰가 있습니다. 사료에는 한명회가 기개가 있고 기골이 장대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이미지에 맞게 유지태 배우를 캐스팅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수양대군 대신 한명회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권력의 실질적 설계자로서의 한명회에 초점을 두려는 연출 의도로 보입니다.
Q. 청령포는 실제로 방문할 수 있는 장소인가요?
A. 네, 강원도 영월군에 실재하는 장소입니다. 2008년 국가지정 명승 제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도 뗏목을 타고 건너가는 형태로 관람이 가능합니다. 영화를 본 뒤 직접 가보고 싶다는 분들이 많은데,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결론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계유정난이라는 정치극 대신, 그 이후 아무것도 남지 않은 한 인간 이용이의 이야기를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왕의 시선이 아닌 어몽도라는 주변부 인물의 눈으로 풀어냈습니다. 저처럼 역사에 크게 관심이 없던 사람도 영화관을 나오자마자 실록을 검색하게 만드는 영화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이미 알고 있는 분들에게는 팩션 기법이 어디까지 역사를 존중하는지를 따지며 볼 재미가 있고, 저처럼 역사를 잘 모르는 분들에게는 단종이라는 인물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처음 알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특히 역사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에게도 한 번쯤 권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박지훈, 류해진, 유지태 세 배우의 앙상블은 두 번째 관람도 충분히 가치 있을 것 같습니다.